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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 않다.
약해지고 싶지 않다.
더 강해지고 싶다.
나날이 쇠약해져가는 현실을 견딜 수 없다.
호국공이 말했다.
제국으로부터 왕국을 구했던 구국의 영웅은 자신의 욕망- 아니, 필사적인 갈망을 위해 모든 것을 저버렸다.
나라를 버리고, 자식 같은 왕을 버리고, 그간 쌓아온 모든 명성을 버리고.
호국공의 이야기에 제일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웃거나 비난하는 대신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며 동의해주었다.
호국공은 사람이었다.
이미 결정했다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고는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흔들리는 구석이 있었다.
나라를 저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왕족들을 몰살하는 것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호국공은 숨을 멈췄다. 의식적인 행동으로 생각 역시 끊어버렸다.
이미 결정했다.
일을 진행시켰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랬기에 호국공은 제일검을 보았다.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한 이를 보며 생각했다.
‘무엇 때문이냐.’
자신과 마찬가지로 십검호의 일인.
아니, 어떤 의미로는 자신 이상이었다.
겨우 서른 남짓한 나이에 검성이 된 자.
왕국 전체를- 아니, 대륙의 역사 전체를 돌아봐도 손에 꼽을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
아직 젊었다.
호국공 자신처럼 죽음의 기척을 느낄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제일검은 마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무엇 때문일까.
명예라면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을 터인데.
돈? 지위? 권력?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호국공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검사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왕당파의 거두에까지 올라섰던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제일검은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에 진심으로 욕망을 품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겉으로 보면 한량.
언제나 느긋한 사내.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모두 사실이었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일검과 실제로 마주한 순간 호국공은 알 수 있었다.
제일검에게 있어 술과 여자, 부와 권력, 명예- 그런 것들은 그리 큰 의미가 되지 못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좋아하는 반찬, 좋아하는 색깔 정도의 가치 밖에 없었다.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
제일검에게 그나마 가치를 지니는 것은 검문과 스펜서 공작 정도였다.
그런데 제일검은 마인이 되기 위해 저 두 가지를 저버렸다.
어째서일까.
제일검이 마인이 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평소라면 궁금하지 않았을 터였다.
제일검이 무슨 생각을 품든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싶었다.
제일검의 욕망을 알고 나면, 그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세일룬 왕국을- 아니, 헨리를 배신한 자신을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호국공은 끝내 입을 열지 못 했다.
제일검에게 어째서 마인이 되었느냐고, 자신처럼 불로영생에 집착한 것이냐고 결국 소리 내어 묻지 못 했다.
이미 추해질대로 추해진 마당이었지만 더 추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제일검도 호국공 자신과 같다.
저 젊은 천재도 호국공 자신과 같은 선택을 했다.
그러니 괜찮다.
다른 누구도 비슷한 선택을 할 것이다.
합리화.
그런 것에 의지하려는 초라한 자신.
그래서 결국 입밖에 내지 못 했다.
무엇 때문에 마인이 된 것인지, 자신처럼 불로영생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죽고 싶지 않아 몸부림 친 것인지 묻지 않았다.
제일검은 그런 호국공을 보았다.
호국공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그가 어떤 말을 참고 있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굳이 호국공을 위해 답을 내주지는 않았다. 그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은 뒤 호국공과의 자리를 파하였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건국 기념일까지 이제 겨우 며칠이 남은 상황.
별궁을 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던 제일검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저 먼 서쪽을 바라보았다.
호국공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제일검은 세속적인 것들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초탈한 것이 아니었다.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제일검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보였거든.”
저 먼 지평이.
과연 닿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저 근원으로의 길이.
술과 여자는 좋았다.
부와 명예도 있어서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것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하찮았다.
지평으로의 길.
검이 좋았다.
검술을 펼치는 순간이 좋았다.
검을 통해 생사결의 대결을 펼치는 것은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지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으니까.
실제로 지평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이었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가 좋은 것도 그래서였다.
두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지평을 보다 명확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언젠가 강해진 두 사람과의 대결이 지평에 보다 가까워지는 길이 될 터였으니까.
“당신과 같아.”
마인이 된 이유.
불로영생을 갈망한 이유.
“아직··· 닿지 못 했거든.”
닿기 위해서는 까마득한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르거든.
검의 지평.
검리로의 길.
제일검은 다시 서쪽을 보았다.
닿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지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유더와 코델리아는 술잔을 몇 번 더 나눈 뒤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제일검과의 악연을 끊고 엘룬을 지원하겠다는 뜻이야 공유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주변에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말리려는 사람이 더 많겠지.’
그림자 숲의 엘프들과 재상군의 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될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아직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림자 숲까지는 적잖은 거리가 있었다.
제국의 국경을 넘은 뒤에도 재상부가 장악한 지역을 한참이나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일단 말리고 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개입하기보다는 우리와 함께 재상군의 본대를 꺾고 북진하여 재상군 전체를 압박하는 것이 낫네.’
황금의 검성인 이안 맥클라인이라면 아마 저렇게 말하겠지.
때문에 유더는 괜히 자신들의 생각을 밝히는 대신 코델리아와 함께 슬쩍 사라지는 쪽을 택했다.
“후아··· 다행이다. 언니 속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델리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으니까.
코델리아의 뒷모습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가 가능한 그녀였다.
“뭐··· 형님이랑 같이 한 발 먼저 사라지신 것 같으니까.”
“하여간 진짜. 나한테는 뭐라고 하더니.”
코델리아가 꿍얼거리자 유더는 다시 작게 웃었다.
좀 그런 생각이긴 했지만, 역시 핏줄은 무시 못 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다 같이 짐승인가.’
“뭐야, 무슨 생각하는데?”
“예쁘고 고운 생각.”
유더의 능글맞은 답변에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무어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럼 바로 출발할 거야?”
“그래야겠지. 왜, 걱정 돼?”
“당연하지. 우리 눈 뜨자마자 무리해가며 칠천 군대를 격파한 후거든? 그 뒤에 물약도 먹고 대충 쉬기도 했지만 제대로 쉰 건 아니잖아.”
무한체력, 무한체력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더가 정말 무한한 체력의 소유자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더는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코델리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난 오히려 우리 공주님이 걱정되는데? 괜찮겠어?”
“나야 뭐 등에 업혀있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리고 평소에도 좀 그렇게 신경을 쓰라구.”
“평소 언제?”
유더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입술을 삐쭉였고, 손바닥에 닿은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유더는 능글맞게 웃었다.
“아무튼 그럼 공주님, 함께 가실까요?”
“네, 왕자님. 등 대세요.”
유더가 돌아서자마자 폴짝 뛰어오른 코델리아는 유더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일단 빠져나간 다음에 팬텀스티드로 갈아타자.”
처음부터 팬텀스티드를 타고 가면 너무 눈에 띌 테니까.
“알았어, 얼른 가자. 이랴이랴!”
“히히힝.”
코델리아의 재촉에 말울음 소리까지 한 번 낸 유더는 흑풍도래를 펼쳤다. 하지만 직후, 유더는 바로 지면을 박차는 대신 코델리아를 고쳐 업으며 물었다.
“그런데 코델리아.”
“응, 유더야.”
“편지는 남겼지?”
“어, 남겼어.”
몰래 사라지더라도 최소한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려야 했으니까.
유더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코델리아가 스스로 사랑의 편지를 남기는 날이 오다니. 정말 가슴이 웅장해져.”
“흥, 전에도 한 번 남겼거든?”
영원의 숲을 빠져나올 때라든가.
“어, 그래서 더 좋아. 다음에는 내용도 보여줄 거지?”
“음··· 하는 거 봐서?”
코델리아의 새침한 대답에 유더는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그럼 가자.”
“응, 가자.”
서쪽으로.
검은질풍이 황금빛 선풍과 함께 했다.
&
시간이 흘렀다.
하루.
밤을 끝내기 위해 떠올랐던 아침 해가 황혼과 함께 저물어 다시 밤을 불러온 때.
엘룬은 레드 게이트 위에 주저앉아 하얗고 둥근 달을 보았다.
계속해서 급보가 전달되고 있었다.
제일검이 이끄는 재상군이 레드 게이트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병력의 규모는 최소 4만 이상.
제국에 거하는 엘프들을 모두 합쳐도 수만 명이 되지 못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엘프들의 대부 빈첸죠 롬바르디는 그림자 숲의 전 병력을 레드 게이트에 집결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모두 모아봐야 5천을 조금 넘는 숫자였지만, 레드 게이트에 의존한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터였다.
‘황제군을 움직여야 한다.’
제국 북부에서 재상군과 대치 태세만 이어가고 있는 황제군.
그림자 숲이 함락되면 내전의 구도 자체가 뒤집어질 수 있으니 황제 쪽에서도 작금의 위기를 관망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버틴다.
어떻게든 버텨서 시간을 만들어낸다.
이쪽에 4만에 가까운 대군을 투입했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 그만큼 병력이 비었다는 뜻이니 황제군 쪽에서도 지원군을 파병할 여력이 생기리라.
엘룬은 고개를 돌렸다.
레드 게이트의 성벽 위에 자리한 이질적인 존재들을, 엘프가 아닌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유더의 친구들.
착하고 우직한 루카스와 장난기가 많고 쾌활한 카이사, 새침하지만 귀여운 스칼렛.
세 사람 모두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룬 역시 굳은 표정을 지었다. 무섭다며 숨어버린 페어리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바람이 불었다.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
평소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랬기에 엘룬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드 게이트의 정문 위에 우뚝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장관이네.”
동쪽에 선 자가 말했다.
재상군은 아직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밤이 깊었으니 바로 공격해오기 보다는 일단 자리를 잡고 새벽에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눈앞에 있었다.
재상군보다 몇 발 먼저 레드 게이트에 도착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거든. 혼자서 성을 함락시키는 거.”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이제는 엘룬만이 아니라 성벽 위에 있던 모든 엘프들이 그를 보았다. 겨우 한 명뿐이었지만 그가 검을 뽑아든 순간 엘프들은 깨달았다. 급히 나팔을 불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고작 한 명.
하지만 엘룬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유더와 대련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흥분으로 몸이 달아오르기는커녕 손발이 차갑게 변했다.
검의 괴물.
검의 악마.
제일검은 웃었다. 성벽 위에 서서 이쪽을 노려보는 엘룬을 눈에 담았다.
그림자 숲을 지키는 요정의 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벨렌시아의 검을 계승한 자.
그녀와의 대결은 분명 제일검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리라.
“하지만 아직도 멀어. 너무 멀단 말이지.”
푸념처럼 중얼거린 제일검은 다시 엘룬을 보았다.
저 너머에 자리한 지평과 그녀를 겹쳐 보았다.
“가자.”
제일검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성벽 위의 엘룬에게 속삭였다.
가볍게 휘두른 검.
거대한 검기가 레드 게이트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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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8장 - 검의 지평 > 끝
< 제118장 - 검의 지평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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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가 무너진다.
하나 둘 무너져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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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애!”
엘룬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검의 악마를 막지 못 하면 모두가 죽는다.
저 검의 악마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자신뿐이다.
반사적으로 외친 그녀는 검을 뽑아들었다. 레드 게이트를 집어삼킬 기세로 밀려오는 순백의 광휘에 맞서 황금빛 검강을 일으켰다.
깨트린다.
흐드러지게 핀 달맞이 꽃의 잎들로 검기를 분쇄한다.
츠콰하!
성벽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연격을 펼쳤다. 허공에 검을 휘둘러 기운을 흩뿌리니 노란 꽃잎과도 같은 검기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카가가가가가가!
부딪혀 부서지고 깨졌다.
온전히 다 막지는 못 해 레드 게이트가 검기에 충돌했고, 레드 게이트를 수호하는 마법의 방벽과 검기가 충돌해 커다란 진동을 일으켰다.
쾅!
두 번째 충격음이 터졌다.
지상에 안착하자마자 엘룬은 다급히 검을 휘둘러 제일검의 공격을 막았다.
과거 빛의 검성이라 불린 자답게 눈부시게 빠른 속공이었다.
“크윽!”
엘룬이 신음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검의 궤적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일검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엘룬이 가늘고 긴 검으로 검의 궤적을 비틀면 즉시 검을 회수한 뒤 재차 빛과 같은 속공을 퍼부어댔다.
쾅! 쾅! 쾅!
극단적인 직선이었다.
너무나 빠르고 강력해 마치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엘룬은 힘겹게 제일검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니, 정확히는 비껴내기 위해 노력했다.
엘룬의 검은 부드럽고 화려했다.
그녀의 검은 무겁고 강하기보다는 가볍고 날카로웠다.
제일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그녀의 검을 시험하듯 더더욱 강한 공세를 퍼부었다.
쾅! 쾅! 쾅!
순백의 검강과 황금빛 검강이 충돌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사방을 뒤덮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지면과 성벽이 뒤흔들릴 지경이었다.
땅이 부서지고 부서진 검강들이 지면을 파헤치니 주변에서는 그저 바라만 볼 뿐 끼어들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엘룬은 검을 좋아했다.
검술을 펼치는 것은 더 좋아했다.
때문에 유더와 대련했을 때 행복을 느꼈다.
서로가 가진 벨렌시아의 검을 교환하며 지고의 기쁨을 누렸다.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감각.
아득히 먼 지평이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지는 기분.
하지만 제일검과의 대결은 달랐다.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제일검과 검을 나눌 때마다 눈앞이 흐려졌다. 오히려 지평으로의 길이 가려지는 기분이었다.
검의 악마.
검의 괴물.
엘룬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의 악마 결합하며 최상급 마인이 된 지금의 제일검은 과거와 달랐다.
진정한 검마.
지평으로의 길을 집어삼키는 괴물.
“하아아!”
이대로는 잡아먹힐 뿐이었다.
엘룬이 크게 소리치며 무리를 했다. 한 걸음을 내디디며 유에 강을 더했다. 순간적으로 전력을 다해 제일검의 검을 튕겨냈다.
카강!
속도가 빠른 만큼 그 반발역시 컸다. 제일검의 검과 손이 순간 위로 튕겨져 나갔고, 둘 사이에서 교차하던 검기 역시 옆으로 튕겨져 주변을 휩쓸었다.
진동과 폭음 속에서 엘룬은 이를 악물었다. 팔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삼키며 화려한 연격을 퍼부었다.
달맞이꽃의 춤.
지평으로의 길을 뒤덮은 어둠을 몰아낼 한 줄기 빛.
아름다웠다.
화려하고 멋진 검무였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튕겨져 나갔던 제일검의 검이 벼락처럼 쏟아져 내려 검무의 맥을 끊었다. 엘룬의 검이 뒤흔들렸고, 검을 쥐고 있던 손이 찢어져 붉은 피가 터졌다. 무릎이 꺾여 자세가 무너졌다.
“약해.”
희열에 젖어 있던 제일검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엘룬.
엘프 최강의 검.
분명 대단했다.
그녀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어울리는 검기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약했다.
그녀의 검은 정말로 검무였다.
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휘두르는 검.
타인을 베고 해하고 죽이기 위해 휘두르는 것과는 다른, 그저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즐거워 검을 휘두르는, 해맑고 순수한 검.
그렇기에 약했다.
그녀의 검에는 바람의 검성의 검과 같은 거친 패기가 없었다.
절대기사 갤러헤드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강철의 마음 역시 없었다.
“먹어주마.”
그리고 보여주마.
진정한 검이 무엇인지.
검이란 것이 결국 어떤 것인지.
쾅!
제일검의 검이 달라졌다.
여전히 빛과 같은 속공이었지만 본질적인 부분이 달라졌다.
“아윽!”
엘룬은 찢어진 손으로 검을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맞섰다.
하지만 검격이 교차될 때마다 엘룬은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네 번째 검격이 교차되었을 때는 왈칵 검은 피까지 토했다.
제일검이 발하는 순백의 기운이 엘룬의 기운을 사나운 늑대처럼 물어뜯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며 부수고 깨트렸다.
더 이상 대결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엘룬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피로 물든 손바닥을 늘어트린 채 엘룬은 제자리에 무릎 꿇었다. 고통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엔 피와 눈물이 가득했다.
“엘룬 님!”
“엘룬 님을 구해라!”
성벽 위의 기사들이 소리쳤다. 열 명이 넘는 엘프 기사들이 성벽 위에서 뛰어내려 제일검을 향해 돌진했다.
“안돼애애애!”
엘룬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제일검이 그런 엘룬을 내려다보며 검을 휘둘렀다.
열댓 명의 엘프 기사들이 사방에서 제일검을 덮쳤다.
그리고 빛.
순백의 검로.
츠콰학!
비명 따위 없었다.
울부짖음도 없었다.
엘프 기사 열댓 명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다.
고고한 빛의 검격 앞에 그들은 단 한 순가도 버틸 수 없었다. 온몸이 잘려나간 뒤에야 자신들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붉은 피가 사방을 뒤덮었다. 마치 비처럼 쏟아져 엘룬과 주변을 뒤덮었다.
“아윽, 아.”
머리를 뒤덮은 피와 육편에 엘룬이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든 일어나 검의 악마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떨려 일어설 수 없었다.
“또 오는군.”
제일검이 조금은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성벽에서 기사들이 뛰어내렸고, 동시에 성문이 열렸다. 마법사들 역시 무어라 주문을 외워 파상공세를 퍼부으려 했다.
그래서 제일검은 검을 휘둘렀다.
그들보다 한발 앞서, 기사들의 발이 지면에 닿기 전에, 성문 밖으로 엘프들이 몸을 내밀기 전에, 주문이 완성되어 쏟아지기 전에.
빛의 검성.
누구보다 빠른 검의 소유자.
츠확-!
순백의 검기가 세상을 뒤덮었다.
성벽에서 뛰어내리던 엘프 기사들은 두 동강이 나 지면을 뒹굴었다. 마법사들이 자아내던 마법은 어느 순간 끊어졌다. 제일검의 검이 마력의 흐름 자체를 베어냈기 때문이다.
성문을 열고 돌진하려던 기사들은 달려나오던 기세 그대로 붕괴해 무너졌다. 수십 조각으로 갈라진 그들의 몸에서 다시 한 번 피가 터져 성문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후두두-
피가 쏟아진다.
육편이 흩어진다.
엘룬은 숨을 헐떡이며 울었다. 자신 따위 포기하라고, 어서 다들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제일검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흥미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엘룬을 쉬이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아직 조금 남았으니까.”
먹어치울 부분이 조금은 남은 것 같으니까.
더욱이 울부짖는 그녀의 존재는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레드 게이트에 병사가 아무리 많아봐야 제일검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엘프들은 무의식 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확히 인식하지는 못 했다.
성문 앞에서 울부짖는 가련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엘프들의 검희가 그들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제일검은 허리에 차고 있던 채직을 휘둘러 엘룬의 목을 휘감았다. 그대로 그녀를 개처럼 질질 끌며 레드 게이트 안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엘룬을 포기 못 하는 엘프들을 사냥한다.
레드 게이트를 지옥으로 바꿔버린다.
“룬 프라우드!”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외침이 제일검의 의식을 붙잡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제일검은 시선을 돌렸고,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루카스.”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일룬 왕국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했던 아이.
언젠가 지평으로의 길을 나아감에 있어 양식이 되어줄 거라 생각했던 아이.
그가 이쪽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검기를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 떠는 대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서 이쪽을 주시했다.
제일검은 흥미를 느꼈다.
엘룬보다 약하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루카스의 검에서 지평으로의 한 걸음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일검은 웃었다.
채찍을 베어내는 검기를 눈치 챘지만 봐주었다.
날카로운 사복검이 채찍을 잘라 엘룬을 풀어주었다. 그 순간 휘둘러진 쇠사슬이 엘룬의 몸을 휘감았다.
“으아아!”
카이사였다.
그녀가 쇠사슬을 당겨 엘룬을 회수했고, 채찍을 베어냈던 스칼렛은 서둘러 자리를 이탈하려 했다.
하지만 무리였다.
제일검이 봐준 것은 채찍을 잘라내는 것까지였다.
“맛있겠구나.”
스칼렛을 보며 제일검이 말했다.
검마인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서 재능만이라면 눈앞의 아이가 최고였다.
그래서 제일검은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약하게.
하지만 스칼렛에게는 그것조차 버거웠다.
“카윽!”
스칼렛은 도박수를 펼쳤다. 제일검이 휘두른 검격에 맞추어 몸을 날렸다. 충격을 최소화시킴과 동시에 자리를 이탈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긋났다.
제일검에게 그런 얕은 수는 통하지 않았다. 미세하게 변한 검로에 의해 스칼렛은 멀리 튕겨져 날아가는 대신 지면과 충돌했다.
“스칼렛!”
카이사가 포효하며 돌진했다. 신수의 피를 일깨운 그녀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일었다.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였다.
하지만 제일검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검사가 아닌 짐승이었다.
지평으로의 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아악!”
카이사의 오른팔이 쇠사슬과 함께 동강이 났다.
스칼렛이 비명을 질렀지만 제일검은 의외라는 듯 오히려 놀란 얼굴이 되었다.
본래 몸을 벨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으아아!”
카이사가 다시 한 번 지면을 박찼다. 하나 남은 왼손에 손톱을 곤두 세운 뒤 제일검을 향해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안 돼!”
스칼렛이 필사적으로 사복검을 휘둘렀다. 제일검의 검로에 사복검을 끼워 넣어 검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설픈 생각이었다.
제일검의 검이 사복검을 갈랐다. 필사적으로 휘두른 검격 따위 제일검의 검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 했다.
사복검이 끊어진다.
순백의 검기가 카이사를 집어삼킨다.
쾅!
굉음이 검기를 부쉈다.
순백의 검이 순백의 검기를 갈라놓았다.
성왕십자검.
루카스 흐레스벨그의 검.
“오.”
제일검이 작게 감탄했다.
검의 연회에서 보았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루카스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군침을 삼켰다.
“루카스.”
카이사의 부름에 루카스는 돌아서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 제일검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오직 제일검의 검에만 집중했다.
엘룬이 처참하게 패한 상황이었다.
카이사와 스칼렛은 제일검의 검격에 마음이 꺾인 와중이었다.
숨을 골랐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정했다.
스칼렛을 지킨다.
카이사를 지킨다.
제일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카이사와 스칼렛 역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빛의 검격.
소위 말하는 무박자였다. 아무런 준비 동작 없이 쏟아진 제일검의 검격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파공음이 울렸다.
루카스의 검이 제일검의 검을 막아냈다.
비록 볼썽사납게 검이 흔들렸지만, 그야말로 간신히 막아낸 것에 불과했지만 막아냈다.
“하.”
제일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루카스가 그런 제일검을 마주하며 말했다.
“스칼렛, 카이사와 엘룬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했다.
그랬기에 스칼렛과 카이사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행동했다. 한쪽 팔이 잘린 카이사를 스칼렛이 수습한 뒤 물러섰다.
“바로 돌아올게.”
스칼렛이 남긴 작은 목소리에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제일검에게만 의식을 집중했다.
“루카스.”
제일검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위태롭게나마 막아냈다.
자세가 흔들렸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제일검이 검의 속도를 높였다. 루카스는 더욱 더 집중하였다.
금속음이 울렸다.
무시무시한 검기가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칼렛과 카이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괜히 발걸음을 지체하는 대신 엉망진창이 된 엘룬을 수습했다.
루카스는 제일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했다.
하지만 스칼렛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남자.
적으로 만났을 때도, 연인으로 만났을 때도 그 사실 하나만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사람.
카이사도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은 몰랐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루카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재능의 격차를 느꼈을 때도, 어마어마한 벽에 부딪쳤을 때도,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좌절해 주저앉는 대신 한 걸음이라도, 비록 그것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걸음이더라도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니 루카스는 할 수 있다.
이번에도 해낼 것이다.
막연한 믿음.
아니,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기억들이 이를 증명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스칼렛과 카이사는 서로를 보았다.
때로는 적이었고, 때로는 둘도 없는 친구였던 두 사람.
그 순간 굉음이 터졌다.
순백의 광휘가 세상을 뒤덮었다.
&
제일검의 검은 너무 빨랐다.
그랬기에 눈으로 좇는 것을 포기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감에 의지하여 막아냈다.
손발이 떨렸다.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러나왔다.
한 번 막아낼 때마다 온몸의 기운이 역주해 몸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빌트바인 영웅전.
영웅 빌트바인.
항상 멋지고 강한 남자.
언제나 앞장서서 모두를 이끄는 빛과 같은 사람.
루카스 자신은 아니었다.
빌트바인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빌트바인 같은 영웅이 되어 모두를 이끄는 상상을 곧잘 하고는 했다.
주변에서는 북부 제일의 재능이라 추켜세웠고,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또래 중에는 루카스 자신의 검을 받아낼 수 있는 자가 아예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착각에 불과했다.
유더 바이엘.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소년.
처음에는 자신보다 훨씬 더 약했다.
하지만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아니, 자신보다 약했던 그 시절에도 이미 그는 이끄는 자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영웅이었다.
란디우스 님께서 유더를 제자로 받아들이셨다.
아무리 간청해도 받아주시지 않았던 그 분이 유더를 보자마자 먼저 제자로 들이겠다고 선언하셨다.
카마엘 님께서 유더를 눈여겨보셨다.
자신이 흐레스벨그 가의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 유더는 북부를 여행했다. 야생의 땅에 가서 악마 추종자들을 무찌르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고, 급기야는 황금의 용왕의 선택을 받아 지옥의 문을 격파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강해졌다.
자신을 훌쩍 뛰어넘어, 제대로 된 대련이 불가능할 만치.
계속해서 이야기가 들려왔다.
환상의 커플.
검의 연회의 우승자.
호국공으로부터 왕족들을 지킨 구국의 영웅.
점점 더 멀어져갔다.
토너먼트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하며 우승했고, 이번에는 남부로 가 놀라운 활약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에인션트 드래곤을 쓰러트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존재.
진정으로 빌트바인과 같은 존재.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추악한 질투의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미워하진 않았다.
원망하는 대신 검을 들었다.
아직도 자신을 호적수라 불러주는 유더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유더가 십검호가 되었다.
축하해 주었다. 더욱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유더가 검성이 되었다.
감탄하며 목표로 삼았다. 좌절해 주저앉는 대신 더욱 더 의지를 다졌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등감에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유더를 볼 때마다 자신은 빌트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와 같은 이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검을 휘둘렀다.
캄캄하고 어두운 길을 계속해서 나아갔다.
제일검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아예 그 기척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루카스는 정면을 보았다.
여전히 검고 어두운 길이었다.
하지만 나아가던 길 앞에 우뚝 선 자가 보였다.
그가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루카스, 오직 너뿐이야.”
막시밀리언도, 레온도, 누구도 아니야.
오직 너만이 함께 할 수 있었어.
오직 너만이 유더를 따라잡을 수 있었어.
예나 지금이나 유더는 성큼성큼 나아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저 멀리 나아가 있고는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느리지만 꾸준히, 주저앉거나 좌절하는 대신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는 지키지 못 했어.”
유더와 코델리아를 지켜주지 못 했어.
마지막까지 두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었어.
코델리아의 죽음을 막지 못 했고, 유더와 함께 최후의 전장에 서지 못 했어.
하지만 너는 아니야.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힘을 빌려줄게.
아니, 빌려주는 것이 아니야.
애당초 너의 힘이니까.
네가 한 발 한 발 나아간 끝에 도달한 경지이니까.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너이기에 손에 넣은 힘이니까.
남자는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빛이 보였다.
검고 어두운 길 너머에 자리한 지평.
곧게 뻗은 길과 맞닿은 그것.
“루카스.”
루카스 흐레스벨그.
“너는 될 수 있어.”
빌트바인이.
스칼렛과 카이사의, 유더와 코델리아의 영웅이.
루카스가 웃었다.
검은 사내의- 검리에 닿았던 유더의 마지막 동료였던 그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오오오오오!”
빛이 작렬했다.
루카스의 검이 보이지 않는 제일검의 검을 막아냈다.
아니, 분쇄했다. 검로를 파괴했다.
제일검이 눈을 부릅떴다.
루카스가 검을 고쳐 쥐며 읊조렸다.
“성왕십자검.”
악을 멸하는 성왕의 검.
결코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
표표한 순백의 십자가가 루카스의 손끝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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